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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시국미사 성명서 아카이브 | 월요 시국기도회

지지피아 2023. 7. 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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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매국 검찰독재정권 퇴진 및 주권회복을 위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시국미사 성명서를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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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서 목차

1. 전주 풍남문 광장 - 3월 20일 <절체절명의 때에 읍소하오니>
2. 4월 10일 시국미사 성명서 - 서울교구 서울광장 <삯꾼은 안 된다>
3. 4월 17일 시국미사 성명서 - 마산교구 창동사거리 <주인이 해야 한다>
4. 4월 24일 시국미사 성명서 - 성남동 성당 <행동 없으면 죽은 믿음>
5. 5월 1일 시국미사 성명서 - 광주 5.18민주광장 <나라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6. 5월 8일 시국미사 성명서 - 춘천 애막골성당 <발본색원이 답이다>
7. 5월 15일 시국미사 성명서 - 광주 5.18민족민주열사묘역 <십자가의 사람>
8. 5월 22일 시국미사 성명서 - 의정부교구 의정부성당 <분단, 겨레의 원한>
9. 6월 5일 시국미사 성명서 - 인천교구 인천 주안1동성당 <믿음의 형제들에게>
10. 6월 12일 시국미사 성명서 - 원주교구 봉산동성당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11. 6월 19일 시국미사 성명서 - 청주 흥덕성당 <나라다운 나라만들기>
12. 6월 26일 시국미사 성명서 - 제주 <양심의 시험대>
13. 7월 10일 시국미사 성명서 - 안동 <저 혼자만 살려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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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주 풍남문 광장 - 3월 20일 <절체절명의 때에 읍소하오니>

절체절명의 때에 읍소하오니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 그리고 <강제동원 배상안>은 일본 극우들의 망언·망동妄動에 뒤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역사적 면죄에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아낌없이 보따리를 풀었지만 빈털터리로, 그것도 가해자의 훈계만 잔뜩 듣고 돌아왔다. 무례한 처신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대통령이지만 굴종 굴신으로 겨레에게 굴욕과 수모를 안긴 죄가 너무나 무겁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윤석열 정부가 청사에 길이 빛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고(2022.8.29), 이태원 참사로 퇴진 목소리가 드높아졌을 때에도 먼저 우리 생활방식을 뜯어고치자며 기대를 접지 않았으나(2022.11.14), 오늘 대통령의 용퇴를 촉구한다.
 
  세 가지 팔을 꺾다
 
  이 나라가 옛 어른들이 꿈꾼 아름다운 그 나라인지 돌아보는 삼일절 아침에 대통령은, “우리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한 것이라며 조상을 탓했다. 그러므로 일본에 사죄나 배상을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해결하자면서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는 다음 세 가지로 헌법을 위반하고 민족정기를 더럽혔으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첫째.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팔을 비튼 죄. 그는 대법이 거듭 타당하다고 판단한, 일본 전범기업들이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배상토록 확정했던 판결을 무효화하였다. 삼권분립을 무참히 파괴하는 저 대담성에 말을 잊는다. 역대 어떤 행정부 수반이 사법부의 판결 이행을 가로막았던가. 더군다나 그는 징용 배상판결을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대법원장을 구속했던 검사였으면서 대통령이 돼서는 최고법원의 역사적 판결을 무위로 돌렸다. 명백한 사법권 침해요, 헌법 수호 책무를 망각하고 헌법을 위반한 행위이다. 근래 검찰의 방탕放蕩은 대통령의 탈선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 끌려가서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돌아와서는 손해배상청구권이라는 지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해서 평생 한을 품어야 했던 노인들의 팔을 꺾었다. 대통령의 통치권에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권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무 돈이든 받으면 잠잠해지리라고 믿는 모양이나 백수白壽 고령의 피해자들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돈은 받을 수 없다”며 울부짖는다.
 
  셋째. 아무 상관도 책임도 없는 우리 기업들로 하여금 배상금과 지연 이자를 물도록 하느라 팔을 비틀었다. 소송 제기를 준비 중인 20만 이상의 잠재적 원고들도 똑같이 떠맡길 모양인데 헌법은 대통령에게 마구잡이로 기업에게 막대한 손해를 지정할 권한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는 배임을 강요했고, 이는 있을 수 없는 직권남용이다.
 
  대법 판결을 뒤집어서 피해자들을 울리고 기업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떠안김으로써 대한민국의 존엄을 짓밟는, 반면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를 향해서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며 거듭 머리를 조아리는 대통령을 따라가면 과연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속으면 안 된다
 
  싱거운 완승 후 일본은 “한국, 징용배상 조치 착실히 실행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어이없는 훈계와 함께 “강제동원은 없었다. 이미 끝난 문제”라고 못 박았다. 적반하장 일본다웠다. 미국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간 협력의 획기적인 장이 열렸다”면서 반색했다. 일본과 순망치한의 관계인 제3자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일본 굴종 굴신을 환호하는 자들이 있다. “미래 향한 진정한 극일의 시작”, “주권과 국익 차원에서 내린 용기 있는 결단”, “대통령 결단은 지고도 이기는 길, 나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련다.” 언론도 호들갑을 떨었다. “강제동원 배상안 확정, 한미일 안보협력 속도 붙나”, “방일에 이은 방미로 한미일 3각 협력체제가 한층 견고해 질 것”. 대한제국의 대신들로서 매국의 대명사가 된 을사오적도 국권을 넘기면서 비슷한 말을 하였다.
 
“한미일 안보협력”이나 “한미일 삼각협력체제”는 그 이름처럼 한국을 위한 미일의 협력일까? 한중일의 항구적 평화를 구상했던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한낱 잠꼬대였을까! <미국을 위한 일본 만들기>인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일본을 위한 한국 만들기>에 다름없는 한일협정이 만들어낸 ‘한미일 공조체제’에서 우리는 안보와 성장이라는 득과 함께 한반도의 분단과 미일 의존체계를 영속화하는 실도 겪었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래야 하느냐 하는 것인데 전임자들이 애써 이룩한 화해와 교류협력의 성과를 비웃는 대통령은 한사코 일본에 기대고, 미국에 업혀 지내려 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미래, 미래”를 외치지만 친일과 반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둡고 슬픈 과거로 우리를 잡아끄는 중이다.
 
  그에게 실격을, 자신에게 삼일정신을
 
  새 길이 두려워 뒤로 돌아가려 함은 만인공통의 관성이다. 더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서다. “국권 강탈 10년도 못 되어 동서고금에 드문 대혁명”(쑨원)을 일으켰던 기미년의 통찰을 되새기자. 하던 대로는 할 수 없이 된 세상, 살던 대로 살아서는 망할 수밖에 없으니 근본부터 바꾸고 새로 출발하자던 삼일정신으로 오늘의 재난에 맞서자.
 
  하나. 성경의 억강부약(루카 1,46-55) 대신 가혹한 ‘강자독식’을 더 나은 미래로 믿으며. 서민 생존권을 무시, 노동자들을 적으로 대하고 파업을 ‘북한 핵위협’처럼 여기며. 4.19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쟁취한 민주주의를 경시하며. 검찰의 권능을 악용해서 정적 제거에 몰두하고 편중인사로 일명 ‘검찰 공화국’을 수립하며. 이태원 참사에서 보았듯이 재난 대비-대응-구조-수습을 위한 공권력을 일신의 안위를 위해 오남용하며. 사죄도 사과도 하지 않고 사사건건 진실을 감추고 남을 탓하며. ‘자주·평화·민족대단결’(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원칙을 깨고 전쟁불사에다 핵무장까지 주장함으로써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며. 극소수의 특권 유지 확대를 위해 남녀노소 각계각층을 벼랑으로 내몰며. 탄소중립이라는 인류공동의 과제를 외면하고 한사코 원전강국으로 재도약하자는 시대착오적인 사람. 그는 “헌법 준수, 국가 보위, 평화적 통일과 자유, 복리, 민족문화 창달을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을 심각하게 어겼다. 역사적 퇴장을 명령한다.
 
  둘. 분단기득권 세력의 기사회생, 재집권으로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낙심은 금물이다. 민주주의는 점진적인 성취로 이룩되며 심각한 중단이나 퇴보는 언제든 있게 마련이다. 6.15공동선언(2000), 10.4선언(2007)으로 전진하다가도 이명박·박근혜 시대의 정체와 역진이 있었다. 그랬지만 촛불들의 뜨거운 참여와 수고로 판문점선언(2018.4.27), 9월 평양선언이 가능했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우리는 숱한 재난과 위기 속에서 놀라운 반전의 기회를 발굴해냈다.
 
  셋. 양심을 지닌 시민이라면 진영을 막론하고 힘을 합치자. 적폐인 보수가 아니요, 노폐인 진보가 아니라면 약자는 안전하고 강자는 정의로운 떳떳한 나라를 만드는 데 성심을 모으자. 지킬 것을 지키고, 고칠 것을 고쳐서 이룰 것을 이루는 역사의 현장에서 모두 만나자.
 
  넷. 믿음을 가진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호소한다. 꼿꼿이 서서 몸을 태우는 제대 초의 듬직한 몸가짐처럼 병든 세상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십자가의 수고를 즐거이 감당하자. 곤경을 위한 곤경은 없다. 소중한 기회가 있을 뿐이다. 지금이 은총의 때다.

2023년 3월 20일 전주 풍남문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2. 4월 10일 시국미사 성명서 - 서울교구 서울광장 <삯꾼은 안 된다>

삯꾼은 안 된다

 
“한다한 사람들아 언제까지나 너희 마음을 고집할 셈이냐.
어찌하여 헛일을 좋아들 하며 거짓을 찾아서 얻으려느냐.”(시편 4,3)
 
 
1. 월요시국기도회의 취지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 모든 교구를 순회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월요시국기도회를 오늘 개막한다. 지금이 절체절명의 비상한 때임을 알리고, 뜻과 슬기를 모아 여럿이 함께 기도하기 위함이다. 멀쩡했던 나라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외교와 안보, 경제·민생·복지 등 모든 면에서 흔들리고 있다. 국고부터 줄줄 새고 있다. “1분에 1억 늘어나는 나랏빚, 앞으로 4년간 이자만 100조”라는 뉴스가 넘쳐난다. 어려운 국민을 돕는 자애로운 지출 때문이 아니다. 위정자 자신을 치장하느라 흥청망청한 결과다.
 
기왕 뽑았으니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할지 모른다. 사제의 양심상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월요시국기도회를 시작하였다. 하느님 나라여야 할 우리나라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으니 “이 세상에 계실 때 큰 소리를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히브 5,7)던 예수님처럼 엉엉 울기라도 해야겠기에 전국 팔도를 다니며 기도할 것이다. 이는 평소에는 마르타처럼 일상에 충실하다가 비상한 때가 되면 마리아처럼 분주했던 모든 일손을 놓고 골똘해지는 복음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엿새는 본당에서 사목하고, 하루는 세상을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시고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사도 10,38)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 눈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월요기도회가 못마땅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경술년 여름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인데” 하며 죽음으로써 망국을 책임지려 했던 매천 선생은 못 되더라도 신부가 되어 오늘까지 겨레로부터 받은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이 될까 하여 기도하는 것임을 거듭 말씀드린다. 사제들의 월요시국기도회는 “불이야, 불이야!” 하고 외치는 다급한 호소다.
 
 
2.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고 권력이니 그가 ‘모심과 살림’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짊어지는 자라서 그런 권한을 허락하는 것이다. 누가 만인을 모시고 살리는 저 신성한 직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적 욕망을 다스려 공익을 앞세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 성경이 ‘목자’라고 불렀던 하느님의 일꾼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옛사람들은 먼저 자기를 완성하고 마침내 타인을 완성시켜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을 성직으로 여겼다. 저를 추켜세우는 벼슬이 아니라 자기를 허물어 낮추고, 낮은 자리의 동포들을 높이는 일을 소명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는 바로 이런 전통에 닿아 있다.
그런데 일 년 전만 해도 우리 시민사회의 일원이었던 윤석열 씨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온 국민 앞에 바쳤던 맹서를 모조리 배신하였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젊은이들이 죽게 놔두었고(이태원 참사), 농민을 무시하고(양곡관리법 거부) 노동자들을 적대시함으로써(“화물연대 파업은 북핵보다 더 위험하다”) 유사 이래 궂은일과 힘든 수고를 도맡았으면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천하지대본’에게 굴욕과 수모를 안기고 있다. 그의 안중에는 1%의 부자와 대기업, 일본과 미국뿐인 듯하다. 내치와 외치 모든 면에서 국익, 국리민복에는 무관심하고 애오라지 특권층의 기득권 수호에만 열을 올린다. 강한 자에게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비정한 “삯꾼”(요한 10,12)을 국제사회가 비웃고 있다.
 
모시고 살리는 섬김의 본분을 팽개치고 반성이나 참회는커녕 거짓말과 변명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남은 4년 내내 똑같은 사고가 반복되거나 더 나쁜 일들이 벌어질 것임을 불 보듯 뻔하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뉘우치는 마음조차 갖추지 못했으니 나라의 주인이 어찌해야겠는가. 나라를 살리고 그를 파멸에서 건져주려면 즉각 퇴진 이외에 다른 수가 없다.
 
 
3. 시대착오적 역진, 위험천만한 일탈
 
2016년 겨울 촛불대항쟁은 우리가 이대로 ‘헬 조선’이어선 미래가 없다는 외침이었다. 2020년 봄 코로나19 사태는 살던 대로 살아서는 전 인류가 공멸이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그런데 윤석열 씨는 시시각각 현실이 되고 있는 ‘거대한 위험’을 무시하며 낡은 삶을 고집하고 있다. 동고동락, 공생공락이 아니라 한 마리 양을 위하여 아흔아홉을 희생시키는 자본의 자유를 주장한다. 시대착오적 역진이다. 기후위기가 부를 ‘대멸종’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생에너지를 비웃고 원전강국을 주장하는 그의 일탈은 끔찍하고 위험천만하다.
 
가만두어도 윤석열과 윤석열의 정부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를 움직이는 엔진이 욕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허기와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귀의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문제는 그러는 동안 피땀 흘려 이룬 한국사회의 가치와 열매들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참사다. 당장 삼성반도체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보라.
 
2023년 4월 10일


서울광장에서 월요시국기도회를 시작하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히브 4,13)  

 

3. 4월 17일 시국미사 성명서 - 마산교구 창동사거리 <주인이 해야 한다>

주인이 해야 한다


항쟁과 혁명

부마민주항쟁과 4.19혁명의 도화선, 대한민국 최초의 유혈민주화운동 3.15의거의 유서 깊은 현장에서 ‘항쟁’과 ‘혁명’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역사에서 나라를 망치는 쪽은 대대로 특권을 누려온 지배층이었고, 되살리는 쪽은 한평생 궂은일을 도맡는 민중들이었다. 온갖 수고와 수모를 견뎌주다가 고비가 닥치면 세상의 죄를 정화하고 인간의 본래 품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느님과 연대하는 일꾼은 우리들, 우리 가운데 있는 보통사람들이다. 마산 시민들은 1960년에 “이승만은 하야하라, 일인독재 물러가라!”, 1979년에는 “독재자 박정희 파쑈 물러가라!”고 외쳤다. 이승만 일인독재, 박정희 유신독재가 나라를 더럽히고 나라의 주인들을 못살게 괴롭혔으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 시작된 ‘혁명’으로, 이 거리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던 ‘항쟁’으로 나라도 사람도 말끔해졌으며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전진할 수 있었다.


자유란 무엇인가?

취임사에서 자유, 자유를 서른 번 넘도록 반복한 사람이 있다. 그가 추종하는 전임자들도 자유를 강조했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자유민주주의”를 내걸고 권력을 연장하거나 폭압을 변명하였고, 심지어 학살까지 자행하였다. 대답해 보라! 자유가 무엇인가? 자유自由는 ‘제 맘대로’가 아니라 ‘자기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나는 나로 말미암아, 너는 너로 말미암아 그래서 존엄하다는 의미다.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거침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묻고 싶다. 당신은 자유로운 자유자재의 인간인가?


미국 정보기관이 대통령실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동맹, 혈맹 그 이상으로 믿고 의지해온 미국이 우리 뒤를 캐고 있다니 씁쓸하지만 대통령실의 대응이 가관이다. 시늉으로라도 화를 낼 법한데 “도청 사실은 터무니없는 거짓… 상당 부분 위조가 됐다… 악의적 도청은 없었다… 미국과 협의하겠다”면서 도둑맞은 자가 되레 도둑을 두둔하고 있다. 한술 더 떠서 언론 자유보다 국익을 먼저 생각하라는 훈계를 빠뜨리지 않는다.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여기저기서 죄다 털리고(기밀, 포탄) 혹은 알아서 먼저 갖다 바치고도(제3자 변제안) 납작 엎드리기만 하는 그를 두고 꼿꼿이 떳떳하게 직립하는 자유자재의 인간이라 말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뭐가 무서워서 있는 걸 “있다!”, 없는 걸 “없다!” 그 쉬운 말도 못하는지 나무라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뼛속까지 병든 한 영혼이 지금 대한민국의 운명을 틀어쥐고 있다.


어차피 주인이 해결해야 한다

부활 소식을 듣고도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빗장을 풀고 밖으로 나가던 때가 있었다. ‘자기我相’라는 지상 최대의 장벽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대거 출현하던 혁명의 그날을 신약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사도 2,1-47 참조). “나는 그를 모르오”(마태 27,43) 하던 사람들이 우리는 남이 아니니 “한마음 한뜻으로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사도 4,32)하자며 ‘한살림’을 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실상을 자각한 이후 생겨난 놀라운 변화였다. 하느님과 사람, 나와 너, 사람과 자연이 둘로, 셋으로 가를 수 있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에서 나온 하나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깨달음은 실로 성령의 불꽃이 지핀 위대한 통찰이었다. 너 따로 나 따로 살던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일이 회개요, 본래부터 하나이니 하나로 더불어 사는 ‘한살림’이 하느님 나라다. 이와 같이 저만 알고 저만 위하는 망상에서 깨어날 때 대한민국은 오늘의 파국에서 탈출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라면 유력 계층일수록 사회를 보호하는 데 책임감을 느끼고 공익을 중시할 것이다. 소속 사회를 보전함으로써 가장 큰 혜택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1910년 한일병탄 이래 정상사회의 지도층이 갖춰야 할 도덕성을 가벼이 여기고 이기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민족의 장래를 스스로 찾아 나갈 지도층을 육성하는 대신 일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협력자 집단을 키워 내는 것이 식민지 교육의 목표였던 바 그 흐름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더럽힌 집을 청소할 이는 오직 주인뿐이다. 동네 논밭 다 떠내려가게 생겼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나가던 사람들이 결국 나라를 살리고 나라를 지켜왔다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자. 우리가 해야 한다. 공정과 상식, 외교, 안보, 경제, 복지, 모든 가치를 무너뜨리는 윤석열의 폭주는 점점 가속될 것이다. 강한 자에게 한없이 비굴해지는 사대事大, 약한 자를 모질게 찌르고 사정없이 구박하는 천대賤待는 점점 심각해질 것이다. 순서만 다를 뿐 우리 모두에게 고통과 불행이 닥칠 것이다.


단결과 연대가 우선이다

당장은 서로 어려움을 알아주고 힘을 합치는 단결과 연대가 우선이다.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쫓겨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들의 설움과 농민들의 한숨을 남의 일로 여기는 한 윤석열의 무모와 무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살피고 어루만지자.


젊은이들에게 호소한다. 동료와 ‘경쟁’하지 말고 불의에 맞서 ‘투쟁’하는 청년의 마음을 간직해 주긴 바란다.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상을 경시하고,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기를 빕니다.”(프란치스코 교종, 2014.8.15. 대전월드컵경기장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


2023년 4월 17일
마산 창동사거리에서

 

4. 4월 24일 시국미사 성명서 - 성남동 성당 <행동 없으면 죽은 믿음>

"한 사람의 죄가 멸망을 불러" 

 

행동 없으면 죽은 믿음
 

1. 광주대단지사건
 
 1971년 8월 10일, 서울시의 무허가주택 철거 계획에 따라 경기도 광주군에 강제이주하게 된 주민 5만 명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줄곧 ‘폭동’, ‘난동’으로 불리다가 50년이 지나서야 ‘8·10 성남민권운동’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게 된 해방 이후 최초의 도시빈민투쟁이었다. 그 시절 없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만고풍상의 현장에 서고 보니 마음이 무겁다. 갈수록 배부른 자들의 횡포는 모질어지고, 불운한 약자들은 하루하루 시들어 가고 있다. 광주대단지에 휘몰아쳤던, “이게 아닌데”, “이건 아니야”,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하던, 생존을 위한 ‘격정激情’이 다시금 솟구쳐서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말끔히 태워주기를 기도한다.
 
좋은 쪽으로 기운이 모아지기만 하면 신바람이 나서 못 해낼 게 없는 한국인데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생명을 억누르고 서로를 짓밟으며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그 책임을 대통령에게 묻는다. 한 때 손바닥에 ‘임금 왕’王자를 그려 다녔다는 그의 이마에서 지금 우리는 다른 글자를 보고 있다. ‘미칠 광’狂.

 
2. 155밀리 포탄 오십만 발
 
자주국방의 상징, K-9 자주포에 들어가는 155밀리 포탄 오십만 발이 사라지고 있다. 전시 대비를 위한 전방 이동이 아니다. 지구상 어디서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 자원’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향하고 있다. 교전 당사국에 살상 무기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해둔 현행법 위반이다. 때문에 155밀리 포탄은 이제 한반도에 없다. 육군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탄 지원에 이어 대통령의 ‘말폭탄’까지 터졌다.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귀띔한 것이다. 미국은 반색했지만 러시아는 “적대적 반러 행위”라며 즉각 반발했다. 그러자 대통령실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할지는 러시아 행동에 달려 있다.”며 도발했다. 남의 집에 불 내놓고 거기다가 부채질까지 한 셈이다. 대법 판결을 무시하고 피해 당사자들을 울려가며 <제3자 변제안>을 들고 일본에 건너가더니, 이번에는 오천만의 생명과 생계를 무시하고 <포탄 오십만 발>을 선뜻 미국에 헌납한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중국과의 경제 협력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대만해협의 긴장에 대해 공연한 훈수를 두었다가 “대만 문제에서 불장난하는 자는 스스로를 불태울 것”이라는 험악한 경고를 들은 것이다. 가만히 있는 주변 강국들의 눈을 찔러 가면서까지 일본과 미국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니 장차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맞게 될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사탄의 본질은 분열이다. 사탄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디아볼로스’는 ‘분열시키다’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분열시키고 반목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가 사탄이다. 반면 “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11) 하고 기도하면서 화해와 일치를 위해 십자가마저 수락하는 피스 메이커가 예수 그리스도다. 남북을 가르고, 여야를 가르고, 동서를 가르고, 남녀를 가르고, 노동자와 사용자를 가르고, 그리하여 상대를 적대하게 만듦으로써 권력 유지를 꾀하는 분열의 술수. 마침내 친일과 친미, 반중과 반러의 갈라치기로 선린우호 관계를 파탄내서 한반도에 전쟁을 부르는 광기를 우리는 신앙과 양심의 이름으로 단죄한다.

 
3. 한 사람의 죄가 멸망을 불러
 
어둠이 몰려오는 세상에 한줄기 빛을 보여 주어야 할 지도자가 7천만 겨레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 마주 오고, 좋은 사람을 만나니 좋은 일이 생기더라 했는데 어째서 우리에게 ‘윤석열’이라는 악연이 나타났을까.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역경이 닥쳤는지 원망스럽기 그지없으나, 더이상 기대할 것도 기다릴 수도 없게 됐으므로 당장은 그에게 맡겼던 권한을 거둬들이는 게 급선무다. 국가공동체를 파멸로 잡아끄는 저 어둔 힘을 방관하거나 용납하는 것 또한 죄의 장본인과 공모하는 크나큰 잘못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로마 5,17)는 말씀과 함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았다.”(로마 5,18)고 하였으니 흥하고 망하고는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하자. 명운이 달린 비상한 때이니 더욱 절실하게 기도하고, 특히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보살피자. 사랑만이 세상을 구한다.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83항)
 
 
2023년 4월 24일
8·10 성남민권운동을 기억하며
성남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 수원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천주교 수원교구 공동선사제연대

 

 

5. 5월 1일 시국미사 성명서 - 광주 5.18민주광장 <나라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역사상 가장 이성적인 집단이 출현할 때가 왔다." 

나라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언론이 쉬쉬하고 있지만 모든 경제지표가 곤두박질치는 중이다. 나라 살림 거덜 나고 있는데 대통령이라는 자는 그저 “굳/건/한/한/미/일/안/보/동/맹”, 열 글자를 되뇌며 사방팔방 헤매고 다닌다. 그에게 천하의 중심은, 천하의 전부는 일본과 미국뿐이다. 일본을 위해서라면, 미국이 원하는 것이라면 살을 베고 뼈를 깎고 제 발등을 찍어서라도 아낌없이 남김없이 바칠 태세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발전이 두 나라 손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므로 앞뒤 가리지 않는다. 어째서 느닷없이 대만을 두둔해서 중국의 뒤통수를 치고, 보란 듯이 수십만 발 포탄을 보내서 러시아의 따귀를 때리는지, 그렇게 해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그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멀쩡하던 나라는 조용히 허물어지고 있다.
 
1. 배 주고 배 속 빌어먹는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으니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겠다며 미국으로 날아갔다. 때마침 ‘한미동맹 70주년’이라는 구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대가가 얼마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1천억 달러, 자그마치 133조 투자를 계약해 둔 터였으니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려 연경으로 향하던 그 시절 짐바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백악관과 의회는 미소와 박수로 보답했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 빈 수레였다. 미국의 심술 때문에 다 망하게 된 반도체·배터리·전기차 문제는 입도 벙긋 못했고, 받아온 투자 규모는 고작 59억 달러, 8조에 그쳤다. 배 주고 배 속 빌어먹는 한국 정부의 미련함이 안타까웠는지 미국 기자가 물었다. “중국 반도체 제조 확장에 반대하는 미국의 원칙 때문에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이 피해를 입고 있다. 주요 동맹국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닌가?”
 
이 나라 대통령은 “아무러면 어떠냐, ‘실질적 핵 공유’라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하며 의기양양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김칫국물부터 마시자 백악관 고위당국자가 나서서 선을 그었다. “핵 공유가 아니다!” 그러자 툭하면 없는 말 지어내고 거짓을 늘어놓는 대통령실이 “한미 간 인식 차이는 없다.”고 말을 얼버무렸다. 어느 쪽이 가짜뉴스인가.
 
‘핵우산’은 몰라도 ‘핵공유’라는,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수 있는 물건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그 자체가 허무맹랑하다. 차라리 남편이나 아내를 함께 갖자고 하는 편이 나을런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는 처녀들은 미련하다 했겠는가. “너희가 쓸 것은 너희가 장만하라.”(마태 25,8-9)고 했던 처녀들이 슬기로웠다 했겠는가. 일각에서는 “그래서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만한 호기도 부릴 수 없게 됐다. 그런 위험천만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워싱턴 선언문>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핵심 유망분야를 포기하면서까지 ‘큰 주먹’을 빌리려고 했던 대통령의 손에 들린 것은 “더욱 강화된 상호방위관계”라는 한 줄이었다.


2. 선의보다 신의가 훨씬 낫다
 
거의 꼴을 갖춘 한미일 군사동맹 덕분에 미국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방패, 전초병으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반도에서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북한과의 외교”(한미동맹 70주년 한미정상 공동성명)라는 훈계를 빼놓지 않았다. 지상최대의 무기시장을 위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판을 뒤엎을 파국은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영영 두 동강이로 지내면서 형과 동생이 미워하고 대결하고, 저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하니 남에게 손 내밀고, 그때마다 큰 빚져가며 증오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단 말인가. 형제를 가르고 저만 살겠다고 시작한 우리는 결국 밑도 끝도 없는 안보를 위한다며 경제를 파탄내고 말 것이다.
 
대통령의 말처럼 “확장억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평화가 오지 않는다. 상대는 잠시 주춤했다가 더 큰 힘으로 돌아온다. 폭력이 폭력을 키우는 악순환이다. 놀랍게도 그는 이런 말까지 했다. “상대방의 선의에 기대는 평화는 가짜 평화다.” 이 말을 그에게 돌려준다. 지난날이야 그랬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미국의 선심에 매달려선 안 된다. 평화를 위한 참된 행동은 누군가의 선의善意에 기대는 수동이 아니라 형제와 신의信義를 나누는 능동이다. 그러잖아도 남북이 믿음과 의리를 키워가고 있었는데 이를 훼방한 것은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2023년 4월 26일자 <워싱턴 선언문>보다 2018년 4월 27일자 <판문점 선언>이 훨씬 아름답고 강력한 ‘확장억제’다. 남과 북은 이미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기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하였다.” 아울러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로, 그리고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만방에 약속하였다. 화해와 공생이라는 쉬운 길을 버리고 한사코 증오와 대결의 전장으로 내뛰고 있으니 애통하고 절통하다.
 

3. 폭력 대 생명력
 
자기들끼리 호의호식하는 걸 좋아하는 자들은 ‘그들의 나라’를 고집하고, 모두 함께 고루 살자는 민중은 ‘우리 모두의 나라’를 동경한다. 하나는 폭력으로 유지되는 나라, 다른 하나는 생명력을 발휘하는 나라다. 폭력은 억누르는 힘이고, 생명력은 살리고 모시고 키우는 힘이다. 역사상 두 힘은 언제나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다. 승리는 대개 폭력의 차지였으나 구원은 언제나 생명력의 몫이었다. 올해 43주년을 맞이하는 <5ㆍ18>은 국가기구의 폭력과 시민들의 생명력이 대립하고 충돌한 사건이었다. 군인들은 광주를 죽였지만 시민들은 군대를 구원하였다.
 
‘그들의 나라’일 때 우리는 쇠했고, ‘우리 모두의 나라’일 때 우리는 흥했다. 저 홀로 세상 주인이 되려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나라는 병들고 전쟁이 온다. 너도나도 주인 되고 서로를 세워주려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야 평화가 온다. 힘센 이가 힘없는 이를 누르고 짓밟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만 살아남는 나라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나라, 자기 안위만 찾는 지도자의 나라가 아니라 지혜롭고 착한 사람이 다스리는 떳떳한 나라가 일어선다. 그러므로 이대로 주저앉지도 물러서지도 말자.
 

4. 연대를 촉구하는 영원한 부름
 
유례없는 성장을 이룬 기적의 코리아가 바야흐로 유례없는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다. 미친 듯 비탈길을 내리달려 물속에 빠져 죽었다던 ‘돼지떼 이천 마리의 질주’(마르 5,13)가 떠오른다. 다시 한번 역사상 가장 이성적인 집단이 출현해야 할 때가 왔다. 광주항쟁 마지막 날,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하던 울부짖음, 그리고 “불을 켜주세요, 여러분.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하던 간절한 호소가 메아리치고 있다.
 
“유다와 함께 대사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떼지어 왔다”(마르 14,43).
 
 
가난한 민중의 눈물겨운 수난과 용감한 저항
그 역사적 현장, 빛고을 광주에서
2023년 성모성월 첫날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6. 5월 8일 시국미사 성명서 - 춘천 애막골성당 <발본색원이 답이다>

발본색원이 답이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예레 5,31)
 
  
1. 기시다가 왔다

 
  <월요시국기도회>가 전주, 서울, 마산, 수원, 광주를 거쳐 오늘 춘천에 이르렀다. “도대체 신부들이 왜 이러는 거요?” 하는 항의를 듣곤 한다. 사실은 하루를 여는 새벽마다 우리 스스로 던지는 물음이다. 우리는 왜 이러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도 묻고 싶다. 지금이 가만히 있어도 좋은, 아니 가만있어야 하는 그런 때인가? “가만있으라 세월호에”(2014.4.16.) 하던 박근혜도, “가만있으라 서울에”(1950.6.27.) 하던 이승만도 가고 없는데 날 저무는 것도 모르고 어째서 빈둥거리기만 하는가?
 
  물론 참고 기다려주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연이은 ‘외교 실패’/ 숱한 논란에 대한 ‘거짓 해명’/ 경제위기 속에서 부자감세·복지축소를 강행하는 ‘민생이반’/ 대통령 부부의 비리는 눈감아주고 야당대표 수사에만 몰두하는 ‘공작검찰’/ 대통령 전용기 MBC 탑승 배제, YTN 민영화 추진 등 ‘언론자유’ 파괴/ 공공 자산 ‘민영화’/ 중대재해처벌법·노란봉투법·안전운임제 등 ‘노동 인권’ 묵살/ 사고예방과 구조에 실패했으면서 진상 규명을 외면하는 ‘이태원 참사’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저 묵묵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무능·독선 행보로 정치·외교·경제·사회 각 분야에 일대혼란을 일으켜도, “한국 대통령은 기본을 배워야 한다.”(이코노미스트)는 외신의 잔소리를 접하던 날에도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기다려주었다. 어서 대통령이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도리에 충실하기를, 그래서 피와 눈물로 이룩한 민주국가의 체계와 제도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울화와 환멸이 낙심과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빌었다.
 
  그러나 윤석열 그는, 번뇌와 망상을 키웠을 뿐 잘못을 뉘우치거나 마음을 바로 잡으려는 아무런 성의도 보여 주지 않았다. 어제 드디어 일본 총리 기시다가 왔다. 윤석열이 일본, 미국과 손잡고 아무도 모르게 벌이는 모종의 거래들에 비하면 대다수 국민을 대경실색케 만든 저 끔찍한 일들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가 대한민국을 어둡고, 위험하고, 가난한 나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 양심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한다. 그만 침묵을 깨고 어서 행동하라고.
 
   2. 화근인 사람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이 어떤 재앙을 부르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마구 떠벌이기만 하는 그는 화근禍根, 재앙의 가장 큰 뿌리다. 실성하지 않고서야 저럴 수 없다. 어느 집 가장이기만 했다면 일가의 풍비박산으로 끝날 일이겠으나, 망나니 칼춤 추듯 하는 그가 남북 칠천만 겨레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듯 오금이 저린다. 발본색원이 답이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교훈 삼아 결단해야 한다. 당시 모든 전투에서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며 일본 수군을 갖고 노는 수준의 최강 조선 수군은 멍청한 지휘관 한 명 때문에 어이없이 괴멸되다시피 했다. 판옥선만 무려 122척이 소실되었고 1만여 명의 경험 많은 조선 수군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날의 패전은 새로운 전쟁을 불렀다. 곧바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대통령의 입만 화를 부르고 키우는 게 아니다. 언론을 공모자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멸칭, ‘기레기’의 장본인들에게 말해서 무엇하랴만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말과 글로써 사실을 비틀고 진실을 가려서 시민들을 속이고 있는 언론 종사자들이라도 1980년 5월 20일, 광주문화방송이 불타버린 일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대법원은 그날의 방화에 대해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라며 무죄를 판결한 바 있다. 언감생심 지조와 기개를 기대하겠는가마는 국민들 눈에 그저 실리와 사욕만 추구하는 집단으로 비칠까 염려스럽다.
 
   3. 아이들을 보아라
 
  그러면 남은 것은 나와 너의 입이다. 흙으로 발암물질을 대충 덮고는 ‘용산어린이정원’이라 부르고, 후쿠시마 오염수가 아무 문제없다더니 해군은 매일 1천만 원 가량의 비상 식수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죽도록 피곤한 일상에 지칠 대로 지쳤겠으나 우리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새싹 같은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지금 우람한 젊은이들도 머잖아 낙심의 벽에 갇히고 말 것이다.
 
  동화작가 권정생은 누구라도 자살을 하거나 자기 몸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고질병에 시달렸으나 오로지 아이들의 앞날과 평화를 걱정했다. 그래서 몽실 언니처럼, 억압받는 처지를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보살피고 아껴주면서 삶의 근원적인 행복과 기쁨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주인공들을 탄생시켰다. 선생은 오늘도 말하리라. 강아지 똥이라도 환한 민들레꽃을 피우거늘 하물며 사람이 사람 속에 피우는 꽃은 얼마나 눈부시랴. 뜻 있는 이들의 작은 실천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바로 잡았던 것이 한국 현대사다. 비바람 부는 날이라도 토요일이면 빌고 바라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촛불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라가 위태로우니 “뭐라도 해야지, 나라도 나가야지” 하는 그들,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나부터 희망이 되면 된다고 믿는 그들이야말로 시대의 예언자다.
 
  더 늦기 전에 교회도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내 백성은 목자를 잘못 만나 이 산 저 산 헤매다가 흩어진 양떼처럼 되었었다. 보금자리를 잃고 산과 언덕을 헤매었다.”(예레 50,6) 하시던 주님의 탄식이 온 산하에 메아리치고 있다. 아직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있거나 용기가 없어서 침묵하는 이들을 격려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선포이며 봉사다. 자애로운 어머니이면서 엄격한 교사인 교회의 사명이다.
 
    4. 아버지들의 투쟁을 기억하고 행동하자
 
  일주일 전 철근공 양회동 미카엘(춘천교구 청호동본당) 형제가 분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조 탄압을 일삼는 대통령이 ‘건설 조폭’을 운운해서 노동자의 명예를 더럽힌 것에 대한 항의였다. 이태원 참사 때도 건성이었던 대통령실은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기 바란다.”고 마치 남 말하듯 했다. 하지만 아는가? 철옹성 같은 권력이라도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함부로 대했다가 별안간 무너졌다는 사실을. 구약의 성전도, 신약의 성전도 그래서 불탔고 그래서 무너졌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아채는 것이 참 지혜요 믿음이다.
 
  갑오년 시월, “추수가 끝난 마을마다 곳간 속 묻어 뒀던 창, 엽총, 없는 사람은 쇠스랑, 낫까지 닦아 들고 나섰다. 만삭 아내의 귀밑머릴 만져주며, 병든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무릎 나온 아들딸들의 코를 닦아주며, 그리고 정든 기둥나무에 눈인사를 보내며 우리의 조상들은 서리 내린 아침 집을 나섰다.”(신동엽, 금강) “왜적을 몰아내자”, “썩은 왕실을 도려내자”는 깃발들이 펄럭였다. 안타깝게도 우금티 고개에서 악전고투했다. 상봉 능선에 일렬로 늘어선 왜군 제5사단의 최신식 화력. 야전포, 기관총, 연발소총이 불을 뿜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 수백 명이, 그 흰옷들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본 수천 명이 차례차례 달려가고 뛰어들었다. 저 고개만 넘으면 새 세상이 열리는데 이 한 목숨을 아끼랴, 하면서. 그날 3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품위와 권리는 옛 어른들의 수고로 거저 받은 것들이니 우리도 우리의 수고를 거저 내놓음으로써 자라나는 세대를 복되게 하자.
 
 
2023년 5월 8일 어버이날
춘천교구 애막골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7. 5월 15일 시국미사 성명서 - 광주 5.18민족민주열사묘역 <십자가의 사람>

십자가의 사람


  금년에도 우리는 망월동 묘역을 찾아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사제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부르심에 응답하려 집 떠나던 날의 초심, 사제품을 받고 세상으로 돌아오던 날의 다짐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령 아래 한반도 전역을 얼어붙게 만들었을 때, 유일하게 침묵을 깨고 피 흘려 저항하였던 도시, 광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빛고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을 마시며 자라났거니와, 사제들에게도 ‘오월광주’는 타성에 젖은 자아를 채찍질하고, 다시금 세상을 위한 헌신을 맹세하게 해주는 일종의 성사이다. 

  1. 십자가, 사람의 사람다움 

  무엇이 사제를 사제로 만들어 주는가? 아니 사람은 언제 사람다운가? 십자가를 짊어질 때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1)는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사람다움의 조건을 알려 준다. 인간은 자주 목마르고 배고프지만 바위 같은 자기 몸을 깨뜨려 물을 쏟아 주고, 제 허벅지의 살을 베어서라도 누군가의 허기를 채워 줄 수 있는 존재다. 그리하여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사제는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다.”(교종 프란치스코)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이 행복할 때도 좋지만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 더 좋아지는” 인생의 신비를 말없이 삶으로 보여 주는 교사다. 동시에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는 강으로부터/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는 나무로부터/ 스스로를 비추지 않는 태양으로부터/ 참 삶의 비결을 배우고 또 배우는 학생이다. 그리하여 사제는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사람, 마침내 십자가의 사람이고자 한다. 

  현실의 십자가는 감당하기 두렵고 꺼려지는 그 무엇이다. 훗날 스승과 똑같은 최후를 자원했던 용맹의 제자조차 “주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마태 16,22) 하고 반발했고, 사실은 예수님부터 피할 수 있기를 기도하셨으니 못나고 겁 많은 우리로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난날을 돌이켜보건대 너무나 자주 “나는 그를 알지 못하오.”(마르 14,71) 하고 잡아떼면서 달아났으며, 그때마다 “몸을 돌려 제자를 똑바로 바라보셨던”(루카 22,61) 스승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분은 아침이슬 같은 보잘것없음이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면서 “내 몸이다 먹어라, 내 피다 마셔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진면목을 깨우쳐 주셨다. 그리고 나날이 그렇게 살아가라며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삼는 사제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부당한 죄인인 줄 알면서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마주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에 붙들렸기 때문이다. 


  2. 십자가, 하늘의 뜻을 실어 나르는 멍에

  수난의 십자가는 누구라도 기피할 불상사지만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잔이다. 하늘의 뜻은 하늘에, 땅에서는 그저 땅의 뜻을 펼치고 이루련다 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일이 없다. 사실 세상은 그와 같은 이분법을 주장한다. 악령 들린 사람이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마르 1,24 공동번역) 하고 대들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반항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문 하느님을 겨냥한 것이었다. 악령의 목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 안팎으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뜻을 땅에서 이루라는 천명天命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 노인이 하느님 나라를 땅에 세우려 태어난 아기의 앞날을 두고 했던 말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그러면 어쩔 셈인가? 그럴 듯하게 시늉만 내고 속으로는 거리를 두거나 멀리 내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럿이 함께 주님이 가신 길을 걷고자 한다. ‘예’ 할 것에는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에는 ‘아니오’ 하는 십자가의 도道. 해야 할 일이라면 하기 싫어도 기어코 해내며,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꾹 참아내는 십자가의 덕德을 포기하거나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어깨를 누르는 십자가가 하늘의 뜻을 나르는 거룩한 멍에임을 우리는 안다. 
 

  3. 십자가의 위력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사흘 만에 일으키셨습니다.”(사도 10,39-40) 하였을 때, 그 ‘나무’는 종교의 위선과 불의한 권력이 야합하여 깎아 세운 폭력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부활은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의 이치에 순종하고 하늘의 뜻을 살피는 이들과 땅의 권력을 차지한 자들의 격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 십자가를 개인의 희생으로 축소하거나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기념비 정도로 여기는 도도한 흐름은 어찌된 일일까. 대놓고 십자가를 “비위에 거슬리거나 어리석은 일”(1코린 1,23 공동번역)이라고 불평하지는 않지만, “예수를 따라 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마르 14,52)던 그날 밤의 도주를 변명하려다 보니 그런 변형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는 안 된다. 땅의 아들이 하늘의 아들로 거듭나는 수는 오직 십자가의 길에 있다. 십자가 없는 사제의 삶은 허영이거나 허세이기 쉬우니 거기서 무슨 보람이나 기쁨을 찾으랴. 

  저항과 대동, 두 정신으로 악마의 군대를 물리친 광주는 십자가와 부활의 표상이다. 항쟁 직후 김준태 시인이 109행의 장시를 지었으나 신문에는 고작 33행 밖에 실리지 않았다. 사전검열을 자행하던 계엄군은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제목에서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잘라 버렸다. 본문 세 곳에 나오는 “십자가”라는 시어를 모조리 들어냈다. 그래서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하는 노래도,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하는 노래도 지워졌다. 마지막 연에서 광주와 무등산을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허락했지만 “십자가여”하고 호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오월의 광주에서 “죽은 자/ 죽어서 살아 있고/ 산 자는/ 살아서 죽어 있었다.”(고은)고 하였듯이 죽어도 죽지 않게 하는, 아니 죽어서 영원히 살게 하는 십자가의 위력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일찍이 “진세를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서울) 하였으니, “몸 마음 갈고 닦아 착한 목자 되리라”(부산) 하였으니, “주님 먼저 가신 길 그 길을 나도 가네”(대전) 하였으니, 그리하여 “겨레를 섬겨나갈 자랑도 크다”(광주) 하였으니 우리 다시 십자가의 분투를 다짐하자.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호소에 공명하는 참여로서, 병든 세상을 책임지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운명을 맡기는 투철한 복종으로서 십자가를 부둥켜안기로 굳게 다짐하자. 


2023년 5월 15일
광주민중항쟁 43돌을 맞이하여
5.18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8. 5월 22일 시국미사 성명서 - 의정부교구 의정부성당 <분단, 겨레의 원한>

분단, 겨레의 원한怨恨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앞을 맡긴 수천만을 이끌고 오늘도 파멸의 진창을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다. 살얼음판 위에서도 그는 태연하고 과감하다. “눈먼 사람이 어떻게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하는 탄식이 밤낮 그치지 않는다. “설마 저러다 말겠지.”라거나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하는 것은 망국적 재앙을 키우는 위험천만한 방관이다. 거리의 촛불도, 골방의 기도도 좋다. 맨 앞이 아니라도 된다. 곁이라도 좋고 맨 뒤라도 괜찮다. 함께하기만 하면 된다. 예사롭지 않은 위기가 목전에 닥쳤다.
 
1. 바다도 끝났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무리 못난 바보라도 제 식구가 마시는 우물에 누군가 침을 뱉거나 오물을 쏟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버리는 그것이 독이 든 것이라면 말이다. 침략과 살육의 전력을 가진 일본이 뭇 생명의 고향이며 인류 공동의 우물인 바다를 영영 오염시킬 태세다. 이웃나라에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강요하는 일본 총리가 자국 어민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핵 폐수’ 투기를 예고했다. 덩달아 마셔도 되는 ‘처리수’라면서 방사성 오염수의 무단 방류를 두둔하는 자가 우리 가운데 있다. 골수 친일파라고는 하나 인류 전체의 생존과 직결된 범죄의 하수인이 되고 싶어 안달이니 어째야 옳은가? 삼면의 바다 어디에서도 육신과 영혼을 위한 소금을 마련하기 힘들어졌다. 바다란 낮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꿀꺽꿀꺽 삼켜서 맑디맑은 생수로 돌려주는 겸손과 사랑의 화신. 그런데 시시각각 우리 영혼을 습격하여 정신을 더럽히는 그가 어머니의 자궁이나 다름없는 저 검푸른 시원始原마저 욕보이려고 한다.

 
2. 허약하고 부실한 한국 민주주의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들을 일컫는 ‘30-50클럽’. 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상 ‘강대국’이라고 불릴 만한 나라들 중에 일곱째로 이름을 올린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2019년). 어디 그뿐인가.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그 7개국 중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1등이었다(2019년). 영국·이탈리아·독일이 우리 뒤를 이었고, 그 다음 등급으로 프랑스·미국이 뒤따랐는데 일본은 일곱 나라 중 꼴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변성룡魚變成龍의 어엿하고 듬직한 나라, 한국이었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코로나의 습격으로 인류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한국은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협조하고, 서민들이 고통을 전담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바이러스 대유행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미중이 패권 경쟁을 본격화하면서 세계화라는 종래의 질서에 금이 갔다. 양쪽에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하기에 따라서는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고도의 직관과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다. 하필 그런 시점에 어떤 기준으로든 보통 이하인 자가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다던 나라는 날이 갈수록 ‘헬조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4·19는 1년 만에 5·16군사반란으로 무너졌고, 5·18은 전두환의 학살과 만행으로 짓밟혔다. 6·10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나 그 결과는 또 다른 군인의 집권이었다. 그러고 나서 2016년 촛불대항쟁이 일어났다. 기무사령부가 계엄령 포고를 설계했지만 촛불의 위세에 눌려 슬며시 감추었다. 2017년 5월 일명 ‘촛불정부’가 등장했다. 민주화 원년인 1987년 이후 20년 만에 찾아온 ‘재민주화’의 기회였다. 시민들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체제교체’이기를 바랐다. 더이상 타락한 기득권 집단의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랐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적폐청산도 삶의 근본적 개선도 없었다. 오히려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 일당이 권력의 주체가 되면서 ‘적폐정권 시즌2’가 도래하였다. 왜 한국 민주주의는 감개무량하면서도 허무한가?
 

3. 체제가 된 분단
 
겪고 보니 ‘검찰독재’보다 ‘군사독재’가 덜 나쁘다. 군사독재는 경제 하나만큼은 책임지겠다고 했고, 정치민주화는 좀 기다려달라고 할 만큼 인간적인(?) 데가 있었다. 반면 검찰독재는 어른들이 천신만고 끝에 거둔 성장과 민주화의 결실을 남의 나라 손에 넘기고는 국익을 챙겼다고 우길 정도로 반민족적·반국가적이다. 군사독재든 검찰독재든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동안 이 땅에서 요지부동의 체제가 된 분단의 산물이다. 뚜렷이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극단적으로 우경화한 정치 지형 속에서, 그리고 사람 잡아먹는 야수자본주의의 옹벽에 갇힌 채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래서 대한민국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넘쳐난다. ‘안보국가’에서 ‘발전국가’로 성장했고, 발전국가를 넘어서 ‘민주국가’로 거듭 성숙하였지만 집권자들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정상 진로를 바라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다. 군비확장에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가만히 있는 교수들이 복지예산이 손톱만큼만 늘어나면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악을 쓰고 난리를 부린다. 재래시장의 가난한 상인들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는 무조건 무슨 당!” 하며 제 발등 찍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삼중수소도 못 걸러내고 다른 방사성 물질도 기준치 일만 사천 배”라고 하던 민족정론지 조선일보는 느닷없이 말을 바꿔 별 거 아니라고 일본 편을 든다. 미국에 천억 불을 쏟아 놓고 와서는 “튼튼한 안보, 탄탄한 경제”라는 현수막이 나부끼게 만들기만 해도 국정 지지율이 쑥쑥 올라간다. 돈, 권력 다 가진 극소수가 기회마저 독점해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을 키우고 또 키워도, 나머지 99%를 각자도생의 살벌한 지옥으로 내몰아 노인자살, 청년자살이 세계 최고인데도 믿을 건 그래도 그들이라며 착한 사람들이 표를 몰아준다. 심지어 교종의 가르침 <모든 형제들>을 공부하는 자리에서조차 “언제부터 교회가 빨갱이였느냐?”, 따지고 대드는 목소리가 갈수록 기세등등하다. 이 모든 비극과 비정상은 분단이라는 원천적 결손에서 비롯한다.
 

4. 꾸짖을 용기
 
가난한 제 동생을 의심하고 미워하고 따돌렸던 칠십 년을 다시 살아보겠다면서 미군도 모자라 왜군까지 끌어들이고, 그러려고 주권마저 팔아넘기는 고질적인 어리석음을 교회조차 꾸짖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에 봉사하는 사목은 또 어떤 일이 되는가? 바로 보자.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노상강도들은 흔히 반대쪽을 보면서 길을 지나쳐 가는 자들과 은밀히 동맹을 맺고 있다.”(모든 형제들, 75항)는 저 무서운 진실을.
 
 
2023년 5월 22일
분단의 선을 넘어 평화의 손을 잡는 
의정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9. 6월 5일 시국미사 성명서 - 인천교구 인천 주안1동성당 <믿음의 형제들에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모내기 마친 논을 바라볼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간직하라.”(필리 2,5) 하시는 예수성심성월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우리 근심어린 심중에는 곰팡이가 번지고 있다.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는가?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도 있는가, 하는 개탄이 그칠 날이 없다. 급기야 ‘경계경보 오발령’ 사태까지 벌어졌다. 발령하는 이유와 구체적 행동요령을 알려주지 않은 채 “대피하라.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하라”, 이게 전부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얻어맞은 서울 시민들은 일대혼란에 빠졌다. 우발적 실수였을까? 머잖아 닥칠 파국을 미리 보았는지도 모른다.       

1. 변모일신 대한민국 

침몰하는 난파선, 대한민국.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각종 지표와 수치가 시시각각으로 경고하는 바다. 세계 경제가 불황이므로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거짓말이다. 코로나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 주요국들의 성장률은 크게 향상되었는데 우리만 장기 침체국면에 빠져들고 있다. 일본마저 제칠 기세였던 수출 강국 코리아가 15개월 연속 무역적자/ 수출 8개월째 감소/ 세수마저 크게 줄어서 1분기에만 마이너스 24조 원이다. “대한민국 1호영업사원”을 자임하는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 따르기에만 골몰하는, 속칭 ‘몰빵외교’을 감행하면서 벌어진 참사다. 그가 한미일 삼각동맹을 기정사실로 만들자 지난 30년간 최대 흑자를 안겨 주던 중국은 최대 적자국으로 돌아섰다. 소득/ 소비/ 소매/ 생산/ 수출/ 재정/ 복지 모두 감소 추세다. 늘어난 것은 팔지 못해 쌓이는 재고뿐이고 가계와 기업의 소득, 정부의 수입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도 그는 무기구매로 18조원, 투자 명목으로 133조원을 미국에 쏟아 주었다. 그런데 미국은 중국 배터리 기업까지 보조금 지급 차종에 포함시켜 주면서 한국만큼은 제외시켰다.

한국이 중국과 등지기로 작정한 것과 달리 ‘두 동맹’은 이상한 행보를 취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변함없이 교역의 최고 최대 파트너로 중시하고 있으며, 누군가 팽개치고 떠난 중국 시장에서 뜻밖의 횡재를 만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끝낼 대반전의 서막이 열렸다며 고무돼 있다. 일본이 정상회담을 목표로 북한과 고위급 협의를 제안하고, 북한이 이에 선뜻 화답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어느 장단인지도 모르고 최전방 돌격대로 나섰던 한국만 허공에 주먹질하는 꼴이 됐다.  

2. 제 정신이 아니다

한 달 후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 해양 투기를 개시한다. “오염수 방류는 인접국에 대한 폭거”라며 규탄 결의안까지 냈던 국민의힘이 얼굴을 바꾸었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1리터 마셔도 된다”는 영국 교수를 불러다가 자민당이나 할 법한 망언을 대신 해주었다. 이에 정부는 용어부터 처리수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맞장구쳤다. 괴이하고 야릇하다. 시늉으로라도 국민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해야 할 정부와 여당이 대놓고 일본 앞잡이 행세를 한다. 언론들도 손바닥을 뒤집었다. “삼중수소 못 걸러낸다. 방류시 7개월 만에 제주에 온다. 일본은 오염수를 처리수라 부르지만 전문가 생각은 다르다.”(조선일보)고 떠들던 신문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앞두고 괴담으로 어수선하다. 당장 삼중수소 오염수가 우리 바다를 오염시켜버릴 것처럼 야단법석”이냐며 꾸짖고 있다. 시찰단은 검증 장비를 가져가지도, 민간 전문가를 동행하지도, 오염수 시료를 채취하지도 않았다. 명단도 일정도 꽁꽁 감추었다. 

드디어 일본 군함이 전쟁범죄의 상징 ‘욱일기’를 달고 부산에 입항했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욱일기와 다르다. 약간 기울어져 있다.”며 어물어물 덮어 버렸다.  일본이 “욱일기가 맞다. 무슨 문제냐?”고 되레 따졌다. 보다 못했는지 언론이 중재에 나섰다. 그것은 “욱일기 똑 닮은”(YTN), “욱일기 판박이”(KBS), 혹은 “욱일문양”(중앙)이다. 아니 “햇살무늬의 자위함기”(헤럴드경제)라고 해야 맞다. 매사가 이 모양이다. 이거 도청 아니고, 그거 오염수 아니고, 저거 전범기 아니고. 

3. 뱀이 하자는 대로 하려느냐

사적욕망 외에 아무 철학도 능력도 없는 자가 어떻게 그 자리를 갖게 되었을까? 한사코 미국과 일본의 꼭두각시처럼 굴신, 굴종하며 굴욕을 안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2016년 겨울 촛불혁명으로 박근혜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문재인과 윤석열의 집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대로는 더 못 산다”는 대중의 호소가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면, 촛불대항쟁 이후 감지된 사회적 변화에 기득권 세력이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으로 만들어 낸 것이 윤석열 정부다. 여기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용납하지 않는 미국과 일본의 강력한 동조가 있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의 고비마다 벌어졌던 싸움이기도 하지만 국가를 사유물로 여기는 그들과 너도나도 고루 잘 사는 대동세상을 바라는 보통 사람들이 지금 일대 격돌을 벌이고 있다. 저들은 나라를 팔아서라도 촛불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 우리는 어쩔 셈인가. 

문제의 열매를 따먹던 그날 저녁 하느님께서 첫 사람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아담은 “하와가 하자는 대로 했을 뿐”, 하와는 “뱀이 하자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뱀에게는 묻지 않으셨다. 스스로 생각해서 운명을 정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뱀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그랬느냐?” 이 질문에는 어찌하여 뱀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벌이도록 내버려두었느냐는 탄식이 전제되어 있다.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권한을 망각하고 남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을 하느님은 슬퍼하신다. 

성무일도 화요일 끝기도를 마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1베드 5,8-9).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다 모를 뿐 오늘도 죽고 매일 죽고 있다. 마을을 습격한 맹수를 제압하는 위험한 일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고, 사람들의 이성을 회복시킬 책임은 누구보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기로 서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대전환이 필요한 때에 대환란이 닥쳤다. 실망하고 비관하며 관망하는 태도로는 위기를 돌파할 수도 복음의 원수를 몰아낼 수도 없다. 깨어 기도하며 사방을 살피자. 우리 곁의 가장 가난한 자, 고통 받는 자 가운데 하느님이 계신다. 



2023년 6월 5일
1985년 5·3항쟁을 기억하며
인천 주안1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0. 6월 10일 시국미사 성명서 - 원주교구 봉산동성당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사랑은 남아도는 젖처럼 넘치는 생명을 가진 강자에게만 있는 것이다.”(문익환) 
 
지성이면 감천이다. 사람이 안간힘을 쓰면 하느님도 움직이신다. 아니, 세상을 살리느라 우리 몰래 하느님께서 진땀을 흘리고 계시니 젖 먹던 힘이라도 보태드려야 한다. 없어야 할 것들을 없애는 일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있도록 하는 일에 힘과 정성을 보태자. 몹쓸 말, 몹쓸 것, 몹쓸 짓들을 말끔히 치우고, 없으면 결코 안 되는 것들을 채우고 세우는 일에 물러서지 말자. 전주/ 서울/ 마산/ 수원/ 광주/ 춘천/ 의정부/ 인천에 이어 오늘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산실이기도 한 원주에서 월요시국기도회가 열린다. 대지에 발 딛고 사는 사람으로서 대지가 병들어 가는 현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니 지나친 염려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마음은 시가 아니라는(不憂國非詩也) 옛 선비들의 충정과 매한가지다.
 
 
1. 소곤소곤 말부터 주고받자
 
임기가 4년이나 남았는데 퇴진을 요구하다니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는 걱정이 들린다. 그새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성화를 부리거나 재촉하는 것이라면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다. 겨레를 섬기는 일꾼이 되겠노라 약속했던 그가 미국과 일본의 종이 되기를 마다 않고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언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분별없이 대만과 중국의 양안관계를 간섭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이라는 숙원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세계가 부러워하던 한국 경제를 끝장내다시피 하고, 남북 화해와 평화의 다리마저 끊어놓고는 이제야 나라가 정상이라는 듯 의기양양하다. 반성이나 사과는커녕 매국노선을 철회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으므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퇴진을 명령하는 것이다. 윤석열은 퇴진하라!
 
불은 언제 끄는 게 좋은가? 보는 즉시 꺼야 한다. 아무리 초가삼간이라도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할 집주인이 어디 있나. 일본의 국권침탈이 본격화하기 한참 전 곳곳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났던 것도 그래서였다. “정말 그래도 될까?” 하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군주의 나라라면 역모로 몰리겠지만 민주의 나라는 ‘탄핵’이라는 번복의 기회를 법과 제도로써 뒷받침하고 있다. 이승만, 박근혜를 도중하차 시켰지만 헌정이 중단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라가 바르게 서고 주권재민의 원칙이 굳건해졌다. 그의 말마따나 오년짜리 비정규직 공무원일 뿐이고 임기만 끝나면 대한민국의 불행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사람이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인데 어디에 쓸 것인가. 선장 하나 바꾸는 게 구명정을 놓고 우리끼리 혈투를 벌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하지 않는가.
 
어디서부터 무엇으로 시작하면 좋을까?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도 있으니 이제라도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자. ‘데모크라티아’, 민주주의 본뜻은 민중의 자치이다. 민주정民主政의 주체인 우리는 투표가 끝나면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 통치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말로만 주인이라 하고 ‘인민’(people)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어 놓은 함정을 파악하는 일도 중요한다. 우리나라는 민주정이 아니라 사실상 귀족정이다. 번번이 승냥이들과 한패인 삯꾼을 만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 미국산 쇠고기와 후쿠시마 핵폐수
 
이명박은 곱창처럼 미국 사람들이 먹지 않는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을 포함,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를 국민에게 먹이려고 했다. 어린 중학생들과 시민들의 대대적 저항 덕분에 지금껏 비교적 안전한 쇠고기를 먹고 있다. 윤석열은 일본의 핵 폐수 투기를 거들고 있다. 처리수이니 믿을 만하고, 그 물에서 거두는 해산물도 안전하니 맘 놓고 먹으라 한다. “세슘 기준 180배 우럭이 또 나타났다”는 일본 측 보도가 있었으나 “우리 바다에는 올 일 없다. 오히려 괴담 살포로 우리 어민 다 죽는다” 하고 있다. “독이 든 복어도 먹지 않느냐?”며 광우병 의심 쇠고기를 홍보했던 사람들답다.

헐벗고 배곯던 옛 사람들도 바다를 더럽힐 궁리는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물이 흘러들어 가면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물가에는 어부들이 늘어서고, 늪과 웅덩이 물은 소금을 얻을 수 있다”(에제 47,8-12 참조)고 떳떳이 말할 수 있었다. 자기의 더러운 것을 남의 우물에 부어버리는 일본의 만행이야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놀아나는 한국 집권세력의 부회뇌동 또한 천벌을 받을 짓이다. 땅은 중금속으로 오염되었고, 공기는 숨 쉬기 힘들어졌으며, 강이란 강마다 녹조라떼가 흐르는데, 마침내 바다마저 방사능으로 침략으로 더러워진다. 이것이 미래세대가 물려받을 유산이라니 참담하다.
 
 
3. 그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지난 1년 동안 윤석열은 윤리, 선, 신앙, 정직을 비웃으며 도덕적 타락의 상태*를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착하고 성실한 것이 가치*있다는 인류의 오랜 경험을 한껏 조롱하였다. 한 인간으로서야 언제까지나 형제로 받아들이겠지만 개인적 이익을 지키려고 서로 다투게 하고,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잔인함이 발생*하도록 만드는 그를 차마 대통령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하느님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슬프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꿈. 너만 목숨이 있다더냐.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들,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들, 물속에서 헤엄치며 살아가는 것들도 제각각 귀한 목숨을 가졌으니 다 같이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이루자는 아름다운 꿈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사람이 사람답기란 이토록 힘든 일일까.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비극과 몰락의 시간 속에 환희와 영광의 때를 간직하는 무덤의 비밀을. 발악發惡하는 자에게는 발선發善으로 맞서자. 사랑은 지치는 법이 없다. 꺾이지 않는 사랑을 나누어 갖자.
 
 
2023년 6월 12일
원주교구 봉산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의 초심을 떠올리며
 
 
*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229항에서 인용.

 

11. 6월 19일 시국미사 성명서 - 청주 흥덕성당 <나라다운 나라만들기>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보수(保守)가 지킬 것은 지키자는 쪽이라면, 진보(進步)는 고칠 것은 고치자는 쪽이다. 보수가 있어서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을 가질 수 있고, 진보가 있어서 무엇인가 버리거나 끝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둘 다 좋고, 둘 다 고맙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사람이 사는 세상도 두 날개를 써야 높이 날고 멀리 간다.
 
 
1. 지킬 때나 고칠 때나
 
하지만 ‘보수’라고 다 훌륭하고, ‘진보’라고 다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지킨다는 보수가 지키기 위해 어떤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지, 고친다는 진보가 고쳐나가기 위해 어떤 십자가를 메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자기 살과 피를 내주는 십자가를 갖지 않는 한 가짜요 허깨비다. 성경은 지키든 고치든 힘없고 가난한 이웃을 염두에 두라고 가르친다. 지켜야 할 것이니 지킨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고쳐야 할 것이라서 고친다 하더라도 힘없는 사람들에게 득이 되지 않으면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키려거나 고치려는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서도, 부서지기 쉬운 사람들은 괴롭게 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들어 올리는 억강부약의 아버지이시니, ‘있는 나’를 낮추어 ‘없는 남’을 높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지켜도 고쳐도 그릇됨이 없다. 이런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나라를 보수에게 맡겨도 되고 진보에게 맡겨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태생이 보수거나 진보인 사람이 있을까?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사안에 따라 보수가 되기도 하고, 진보가 되기도 할 것이다.
 
 
2.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된다
 
눈만 뜨면 대립하고 의심하고 격돌하는 한국사회다. 공동선에 부합하는 최상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다툼이라면 오히려 권장할 만하다. 하지만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하고 만다. 지역감정에 사로잡혀서, 여태껏 6.25라는 원한에 눈이 멀어서 무엇이 자신과 미래세대를 위한 선택인지 차분히 생각해보지도 않고 맹목적 지지와 다짜고짜 반대로 갈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극단적 성향의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특정 커뮤니티가 복제해내는 거짓뉴스에 맛들이고 나면 이성적 판단이 작동할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는 무슨 당만 찍는다”고 했던 어느 시장 상인의 ‘양심선언’(?)을 듣고 있노라면 민주주의가 가능하기나 한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매사에 둘로 갈라져 욕하고 미워하는 쟁투에 신물이 난 나머지, 너 나 할 것 없이 교회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 세상사는 아예 거론하지 않기로 하자는 묵시적인 합의가 대세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정도로 우리네 마음은 상처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런들 심리적 내전은 멈출 줄 모르고, 작은 일에도 우리는 격렬하게 반응하고 충돌한다. 신앙인이라도 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어느 한쪽에 기운 인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는 분단체제 속에 생겨난 원죄와도 같은 것이니 서로 이해해 주어야지 등을 돌리거나 미워할 일이 아니다.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 원수는 따로 있다.
 

3. 진보와 보수 공동의 적
 
진보와 보수 공동의 적敵이 있으니 그것은 입장이 다른 ‘남’이 아니라 나만 위하는 ‘나’ 자신이다. 한사코 저와 제 사람들만 위하려는 ‘사사로운 사랑’이 진보와 보수의 진면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물론 안으로만 굽는 팔을 좌우에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선을 유지 발전시켜나갈 지도자를 찾아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국가라는 집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가장 큰 사랑, ‘사회적 사랑’을 발휘하리라 믿었던 지도자가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으로 시작해서, 일본 <핵폐수 무단투기>까지 대통령이라는 이는 목숨 내놓고 지켜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영혼을 짓밟고 국민생명권 보호 의무마저 보란 듯이 팽개쳤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부화뇌동하느라 경제를 망쳤고, 모처럼 축제에 참석했던 젊은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기껏 마련한 양곡관리법과 간호사법을 거부했고, 노동자들을 적대하고 노동조합을 모욕했다. 정작 끊어 버려야 할 친일, 친미 사대근성은 키우고 또 키웠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런 청개구리는 없었다. 영혼의 목자인 사제들은 그에게서 ‘자기애적自己愛的 성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을 본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에 빠져 대화와 소통을 거부하고, 자기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상대는 가차 없이 처단하는 모습은 나르시시즘의 전형적 특징이다. 그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좌와 우, 심지어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극우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는 실격의 배신자일 뿐이다.
 
 
4.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2016년 겨울 촛불대항쟁으로 본분을 잊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던 날,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 때의 열망과 성취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실 촛불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었으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듯 세상을 ‘촛불’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강자들의 사생결단이 윤석열의 집권이라는 변칙적 사건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한방에 끝내는 민주주의는 없다. 프랑스대혁명을 보더라도 1789년 8월의 역사적 인권선언은 대장정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첫 공화국이 성립한 것은 1792년이었고, 그 후로도 나폴레옹의 황제정치, 부르봉가의 왕정복고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제정帝政이나 왕정王政으로의 복귀 위험이 사라진 것은 제3공화국이 수립되던 1870년에 이르러서다. 우리도 갈 길이 멀다.
 
아직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모든 면에서 거꾸로 달리는 이 폭주열차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물론이고 인류사회 전체의 대혁신, 대전환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오히려 복된 시기를 맞았다고 여기자. 당장의 성과보다 “옳은 일이니 내가 하겠다. 나라도 하겠다”는 결기로 긴 성공을 도모하자. 먼저 예수성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자. 사리사욕으로 뭉친 기득권동맹을 거슬러 아직 가져보지 못한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자면 나다운 나를 먼저 세워야 한다. 날로 새로워지자. 깊어지고 넓어지자.
 
 
 
2023년 6월 19일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청주 흥덕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2. 6월 26일 시국미사 성명서 - 제주 <양심의 시험대>

양심의 시험대

  ‘최종해결책’이라며 핵 오염수 방출을 벼르고 있는 일본을 생각하면 분이 차오른다. “이것이 인간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심 때문에 괴롭다. 도쿄전력이 거듭 예고해온 절차가 실행되는 순간 우리 앞에 지옥문이 열린다. 거대한 저수지 둑이 터지면 그 아래 평온했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그런 재앙이 지구 생태계를 덮칠 것이다. 일본과 한국 두 정부는 입을 맞춘 듯 국제원자력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믿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소가 웃을 일이다. ‘원자력체제’의 유지를 위해 오늘까지 거짓과 속임수, 은폐공작을 일삼아 온 마피아가 과연 인류 전체의 생존을 책임져줄까?
  

1.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사태

  자기 오물을 남의 얼굴에 끼얹겠다는 일본 정부에 묻는다. 옛날에는 빈말으로라도 함께 꽃피워 번영하자며 대동아공영共榮을 선전하던 나라가 지금은 대놓고 세계 공멸共滅을 밀어붙이고 있다. 해양 투기 말고도 얼마든지 합리적인 해법을 마련할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가? 돈도 돈이지만 사실은 핵 산업 실패의 증거를 없애버리고 싶은 게다. 인류역사상 이만한 인면수심과 후안무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루에도 수십 번 “폐를 끼쳐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는 일본의 양심과 윤리, 아니 상식이 정녕 이런 수준이었나? 일본에도 하늘의 이치를 논하거나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교회와 학교가 없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막지도 나무라지도 못하고 그저 묵인하는지 답답하다.  

  한때 우리도 인분을 바다에 버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못난 짓을 그만 두었다. 굴 노로바이러스 등 인분 투기의 폐해가 심각한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핵폐기물 방사성 오염수 투기는 그런 차원의 일이 아니다.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이며 이제껏 사람은 물론 하늘도 땅도 겪어보지 못한 미증유의 사태다.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미 나타난 징후들로 보아 끔찍하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한국 대통령이라는 자는 현생인류 최대의 재앙, 최악의 범죄를 방조, 동조하고 있다. 비리와 악행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바다를 멸절케 한 죄 때문에 그의 비극적 말로가 앞당겨질 것임을 우리는 안다. 


2. 무관심, 무감각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핵폭탄 ‘리틀 보이’가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히로시마 사람들은 월요일 아침을 맞고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에서 작은 폭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는 했으나 그것 하나로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계는 지금도 방사능 오염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다. 요나처럼 “사십일 후면 무너지리라” 하고 외치는 예언자들이 간혹 없지 않으나 몇 달분 소금을 사재기 하는 것으로 불안을 감추고 있다. 보다 못한 젊은이들이 울고불고 소리친다. 

  “우리에게 언제 물어보기라도 하셨나요? 살아도 얼마 살지 못할 어른들이 앞으로도 한참 살아야 할 우리와 미래세대의 운명을 왜 맘대로 결정하려 하십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습니다. 아기를 갖고 싶어도 기형아가 나올까 무섭고, 산모가 미역국조차 맘 놓고 먹을 수 없을 테니 출산은 물론이고 아예 결혼을 하지 않겠습니다.”(6.19 청주 월요시국기도회에서 YWCA 실무활동가)

  암이 발견되면 의사는 그 부위를 떼거나 잘라내서 온몸으로 번지는 불행을 막는다. 원자로 노심이 녹아버린 후쿠시마 원전은 지구의 암 덩어리나 다름없다. ‘희석’이라는 처방을 내세우며 바다로 흘려보내는 짓은 암세포를 전이시키겠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심각한 위험을 알아서 해저터널을 통해 수 킬로 밖에다 쏟아버리는 얌체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인류 전체가 양심의 시험대에 올랐다. 핵 폐수의 꼭지를 트는 순간부터 속도만 느릴 뿐 핵폭탄 단추를 누를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막을 것인가, 용납할 것인가?


3.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막아야 한다 
    
  미국은 핵무기를 써서 민간인 22만 명을 살상한 나라이면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일본은 핵발전소 붕괴로 국토 상당 부분이 치유불능의 오염지대로 전락하게 된 나라이면서 핵발전소를 더 짓고 있다. 기본적으로 원자력발전과 핵무기가 일란성쌍생아라서 그런지 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에 관해서 아무 이견이 없다. 미일과 군사동맹의 일원이 되었다고 천하를 얻은 것처럼 좋아하는 윤석열 정부에는 따로 입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셈인가?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실상을 아는 전문가들은 이 비극이 1천 년 이상 지속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호미로 막을 수 있을 때 막아야 한다. 악한 선례는 또 다른 사례를 부른다. 핵발전소를 갖고 있는 나라마다 문제가 생겨서 같은 해결책을 쓰겠다고 나서도 아무 할 말이 없게 된다.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대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시민들이 나서서 이웃을 설득하고 목소리를 합쳐야 한다. 핵 폐수 뚜껑을 봉인할 무기를 찾아보자. 여론 따위야 얼마든지 무시하겠다는 목석이라도 사람들의 눈빛에는 돌아서게 돼 있다. 투표라는 무기도 막강하다. 어느 정당을 지지하든 상관없다. 소금과 멸치, 김과 미역을 지켜주는 쪽에 표를 몰아줄 테다, 하는 전화 한 통이라도 얼마든지 위력적인 행동이다. 

  오늘날 양심이 무너지고 타락한 것은 돈과 쾌락 앞에 맥을 못 추는 현대문명의 병폐지만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린 종교의 책임도 크다. 치국평천하에 소용이 되지 못하는 수신제가라면, 중생구제 외면하는 안락선정이라면, 믿어서 복 받고 죽어서 천당 가자는 복음이라면 세상을 속이고 좀 먹을 뿐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종교 또한 양심의 심판대에 올랐다. 


2023년 6월 26일
해마다 가장 먼저 태풍을 맞이하는
방사능 오염수도 가장 먼저 마시게 될 
생명의 섬 제주도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과학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원불교 개교의 동기) 

 

 

13. 7월 10일 시국미사 성명서 - 안동 <저 혼자만 살려다 보니>

저 혼자만 살려다 보니


  군부가 총과 탱크를 앞세워 나라를 뒤집고, 이에 맞서는 시민들을 무참히 찌르고 베어 쓰러뜨리던 2021년 미얀마의 비극을 보면서 많은 이가 대한민국의 어둡고 슬펐던 지난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코가 석 자다. 윤 아무개의 검찰독재가 그 나라 군부독재와 크게 다르지 않고, 우리가 미얀마의 저항정신을 빌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한민국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멀쩡하던 나라가 갑자기 병든 것일까, 아니면 잠복하던 기저질환이 발동한 것일까?

  1. 저들 좀 보아라

  국민의힘 의원들이 횟감이 담긴 수조의 바닷물을 마셨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 물, 먹어도 되는 게 아니냐”면서, “아, 이거 완전 바닷물이네. 짭조름한데” 하면서 손으로 떠 달게 마시고 있었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던) 2011년에 방류해 우리 근해까지 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 방류할 물보다 이게 훨씬 진한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럴 때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일본 네티즌들은 배꼽을 잡았다. “한국에는 해수 마시는 습관이 있는가?”, “아직 ‘처리수’를 방출하기도 전인데 이건 쓸데없는 배짱 테스트”라며 한껏 비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욕먹을 사람들이 일본 앞잡이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어째 이 모양 이 꼴인가? 

  대일 굴종노선을 천명한 대통령 눈에 들어 공천을 떼놓은 당상으로 만들고 싶어 벌인 일종의 ‘행위예술’인지도 모른다. 나름의 호구지책이려니 하고 참아 준다. 그러면 그 윗전인 윤석열 씨는 어떤 연유로 누가 봐도 손해만 보는 외교를 일삼고 있는가. 세상이 아는 대로 대통령 부부에게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염 긴 어느 도사 때문일까? 생존의 교두보로서 한미일 군사동맹을 달성하려는 미국의 명령 때문일까? 미국은 한국의 성장 동력을 빼내어 일본을 도와줌으로써 중국을 견제하고 러시아를 억제해서 자신의 우위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윤석열은 동맹 미국을 중시하되 일본하고는 동등한 우방으로 지내는 종래의 외교 노선을 폐기하고, 미국의 우산 아래 들어가기 위해 우선 일본의 ‘꼬붕’이 되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한번 발을 담갔으니 핵폐기물 해양투기까지 마치 자기 일처럼 극력 옹호할 수밖에 없었고, 덩달아 비위가 좋은 여당 국회의원들이 비린내 나는 수조의 묵은 바닷물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던 것이고.

  2. 우리가 우리 발등을 찍는 이유

  구제불능의 수구정치 집단이 특정 지역에서만큼은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를 독차지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국민의 눈과 귀를 조작하는 언론이 전폭적으로 돕고 있기 때문이지만 지각없는 유권자들 탓도 크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을 거부했다. 가뜩이나 쌀농사가 위축되고 있는데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식량의 무기화 조짐이 역력한 때에 돈 많은 정부가 가난한 농부의 주머니를 더욱 빈곤하게 만든 꼴이다. 그런데도 거부권이라는 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휘두른 것은 농민들을 아무리 억눌러도 끽소리조차 못하는 존재라고 보아서다. 그러면 농심農心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일구월심으로 자기를 죽일 자에게 표를 던져서 두둔하고, 끝내 자기를 억압하는 자를 지도자로 모시려고 하지 않는가. 지역감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의 신비, 무지의 광란이다. 

  대통령과 여당, 그리고 시급한 개혁을 뒤로 미루는 야당 내 기득권세력은 물론이고 한사코 자기를 우습게 여기는 집단에 표를 몰아주는 유권자들의 공통 심리가 있다. 그것은 저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고약한 이기심이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국민들이야 죽든 말든,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착각이 금수강산을 살벌한 강토로 만들고 있다. 저만 위하는 사회가 결국 어떻게 망가지는지 당장 주변을 돌아보라. 지금 나는 괜찮은데, 하는 사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당해 보지 못한 시련이 밀려오고 있다. 



  3. 배척과 보복으로는 오래 못 간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처럼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 인간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리는’ 문화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종, <복음의 기쁨> 53항)

  한국사회는 배제와 배척이 살인처럼 나쁘다는 말씀을 곰곰이 새겨들어야 한다. 만물 일체가 한 뿌리에서 생겨나 하나로 이어진 한 생명임을 잊고 지내는 세태를 꾸짖는 가르침이다. 모든 종교는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화이부동和而不同, 구동존이求同存異, 다름이 있어도 서로 그것을 인정하면서 인류 공동의 꿈을 위해 힘을 합쳐야지 누구를 차별하고 누구를 배척해서는 결코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없다. 겨레의 절반인 북한을 배척하려다 보니 미국과 일본을 상전으로 모시게 되고, 그러자니 중국과 러시아하고는 등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종속이라는 노예의 지위와 참담한 추락이다. 그래서 잃는 것은 무엇인가? 주권과 독립이다. 한편 농민을 우습게 알고 노동자와 노동조합, 시민단체를 뱀 보듯 하며, 국정의 동반자여야 할 야당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국민의 절반 이상을 피의자로 대하게 되고 검찰의 칼을 빌려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지만 민심은 지금 폭발직전이다.  

  우리 모두 생명을 키워서 겨레의 밥을 짓는 어머니, 농민들에게 배우자. 저만 잘살면 그만이라고 믿는 것처럼 허망하고 어리석은 착각은 없다. 욕심에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싶겠지만 그 결말은 자신마저 없애는 공멸이다. 누구보다 대통령은 낫과 호미의 날카로운 끝을 쓰는 사람 쪽으로 구부려둔 이유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함부로 휘두르다가는 상대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손가락이나 발을 베기 쉽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검찰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남의 티끌이라면 먼지만한 것도 태산처럼 키우면서 정작 자신의 특활비 내역은 숨기고 감추는 검찰. 정의로운 법 집행자인 척하지만 뒤에서는 혈세를 흥청망청 탕진하고도 사용 내역을 먹칠해서 숨기고 백지 영수증을 내미는 뻔뻔한 검찰. 대통령 아내의 주가조작과 장모의 잔고증명위조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뭉개거나 눈감아 주는 능청꾸러기 검찰. 그러면서도 미운털이 박힌 사람들에게는 난동에 가까운 압수수색으로 공포정치를 일삼는 검찰.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좀 들여다 보라. 한때라도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검사”가 되고 싶었다면 자신이 모시고 섬길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 가슴에 손 얹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아라.   



2023년 7월 10일
나눔과 섬김의 생명공동체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 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 자료 출처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한겨레신문 

 

 

"시국미사 기도회 일정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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